[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설레는 봄처럼
설레는 봄처럼 아름다워서는 안 되는 말이 있지 /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이야기할 때 / 열을 세고 난 후 말해야 하지 / 나는 나의 언어로, / 당신은 당신의 언어로 말해야겠지 / 입을 다무는 봄 // 구렁이 담 넘듯 계절이 오고 / 강물같이 시간은 지나쳐 가는데 / 시카고 겨울은 춥고 길기만 했지 / 봄인가 싶으면 다시 눈이 내리고 / 함께 없어도 함께일 수 있다는 말에 / 봄은 일찍부터 설레었지 / 눈처럼 쌓였던 침묵을 녹이고 /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다가오는 봄 / 아름다워서는 안 되는 말을 마구 쏟아내고 싶었지 / 함께 걸을 수 있다는 어처구니 / 입을 다무는 나무가지 마다/ 하얀 꽃망울을 품고 / 봄처럼 설레고 있지 지난 늦가을 한국방문에서 돌아온 후 심한 불면증으로 고생하였다. 생각에 생각이 끊이지 않아 잠들 수 없었다. 시카고에 도착한 후 거의 두 달 동안 깊은 잠을 잘 수 없어 낮시간에도 졸음이 몰려 와 사람을 만나고 운전하는 일조차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다. 입춘이 지난 지가 언제인데 몇차례 또 눈이 내렸고, 장마비처럼 며칠 동안 쉼 없이 비도 뿌렸다. 봄은 걸음을 재촉했지만 겨울은 호락호락 그 길을 내 주지 않았다. 뒤란의 꽃밭을 가꾼지 30년이 되어간다. 집을 지어 이사 온 후 그 다음 해부터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뒷쪽으로 펼쳐있는 무성한 잡목들을 정리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매년 봄이면 꽃나무를 심고 정원을 넓혀갔다. 봄이 오면 창가에 유난히 새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에 어서 일어나라는 얼람소리보다 듣기 좋은 새소리에 잠이 깨곤 하였다. 봄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쌀쌀한 새벽공기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몸의 세포들을 눈뜨게 했다. 겨우내 쌓여있던 낙엽들을 들추니 바늘 같이 뾰족히 올라오는 싹들이 보인다. “어서 자라나거라.” 한겨울을 힘겨워했던 내 모습을 보는듯해서 측은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언제 다시 쏟아내릴 지 모를 눈을 피하라고 젖은 낙엽을 덮어주었다. 나무가지마다 움트는 꽃망울들이 아침햇살에 반짝인다. 싹이 트고, 입이 자라고, 꽃이 피어나는 모든 과정을 우리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상상해볼 수는 있다. 깜깜한 불면의 시간을 견디어낸 후 봄을 향해 일어서는 싹에게서 배운다. 누구의 관심도 사랑도 받지 못한 싹도 봄이면 제 생명을 키워 세상으로 얼굴을 보이거늘 우리는 봄의 설렘 앞에 무엇이더냐. 이른 봄부터 피어날 꽃 중에서도 제일 기다려지는 꽃이 있다. 볼품 없는 잎사귀들이 살아나면 긴 대궁이 올라오고 그 대궁에 작은 꽃망울들이 옹기종기 모여 한무더기의 보라색 꽃무덤을 이루면 그야말로 뒤란은 보라색으로 변하게 된다. 꽃이 피기 시작하면서부터 한 달 남짓 그 꽃을 보려고 잠을 설친 적도 많았다. 그 사이 아이리스가 우아한 꽃을 학처럼 피어내고, 하얀 데이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노란 달맞이꽃, 향기로운 보라색 라벤다가 연이어 피어나는 뒤란은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저마다의 색깔을 뽐내며 꽃을 피운다. 누우면 잠드는 나였다. 신기한 겨울을 어떻게 견디어 냈냐고 물으면 “시간은 멈추지 않고 가더라” 그게 궁색한 답변이 될 수 있을려나? 이어폰을 끼고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베개를 무릎 사이에 끼고 옆으로 몸을 누이고, 숫자를 세보기도 하였지만 허사였다. 잠들지 못해 엎치락 뒷치락 했던 밤이 아니라 설레는 봄을 맞이하려 일찍 잠들어야 했다. 잠들지 못했던 어떤 이유보다 더 큰 봄의 설렘은 초조함에서 관조의 힘으로 스스로 지어낸 울타리를 넘어 새처럼 자유로이 날아들 것이다. 불면의 밤은 사라질 것이다.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지혜와 기쁨으로 설레는 봄을 맞이할 것이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보라색 라벤다 보라색 꽃무덤 시카고 겨울